Bram Stoker, "The Dracula"

Dublin, Ireland/About 2014. 10. 15. 17:42







 매년 마다 열리는 Bram Stoker Festival, Bram Stoker라는 작가를 아시나요? 바로 드라큘라 이야기를 최초로 만들어낸 작가입니다. 호러 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드라큘라를 만들어 낸 Bram Stoker, 더블린에서는 그의 명작을 기념하는 축제가 매년 10월마다 열리고 있습니다. 10월에는 Halloween이 있죠! 드라큘라와 어느정도 연관성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Bram Stoker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서 먼저 Festival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려드릴게요. 올해는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열리는데요. 이 축제는 Bram Stoker의 삶, 작품, 유산 등을 기리고, 그의 고딕 소설인 '드라큘라'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입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더블린에서 열리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공식홈페이지 참고하셔서 행사 즐기시기 바랍니다!


공식홈페이지 보러가기!













 그럼 그의 생애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래 모든 글은 Wikipedia에서 퍼온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글을 이렇게 긁어서 어설픈 번역을 한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가 컸습니다. 작년 더블린에 거의 도착하자마자 거리에서 Bram Stoker 이벤트를 알리는 광고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때는 초기정착에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쳤었는데, 그렇게 1년이 지나 다시 Bram Stoker 축제를 알리는 광고를 볼 수 있었어요. 조금이나마 그가 누구였는지, 단순히 Dracula를 만들어낸 창작가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테니, 알아보고자 이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원글 주소 - http://en.wikipedia.org/wiki/Bram_Stoker






 Abraham "Bram" Stoker는 1847년 11월 8일, 더블린 북쪽에 위치한 Clontarf, Marino Crescent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곳은 지금도 관광객들에게 꽤 유명한 장소 중에 하나인데요. 그는 더블린 태생의 아버지 Abraham Stoker(1799-1876)와, 슬라이고 출신의 어머니 Charlotte Mathilda Blake Thornley(1818-1901) 밑에서 자랐습니다. Stoker는 7형제 중 셋째였고, 독실한 카톨릭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세례도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Stoker는 어려서부터 원인 불명의 병으로 몸이 좋지 않아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7살이 되어 학교를 가게 될 때쯤 그의 병이 다 나았습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유년시절에 대해 Stok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고 신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유년시절에 길고 길었던 침대에서의 생활이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후에 큰 기회가 되었다." 원인불명의 이 병이 다 회복되고 나서는 큰 질병없이 성장한 그는 1864년 부터 1870년까지 트리니티 대학에 재학하면서 대표 육상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수학과를 졸업한 그는 the College Historical Society('the HIST')의 회계감사원이자, the University Philosophical Society의 학장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자신의 첫 논문인 "Sensationalism in Fiction and Society"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Stoker는 또한 학생시절 알고 지내던 친구인 Dr. Maunsell과 알고 지내면서 연극세계에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딕소설 작가였던 Sheridan Le Fanu과 Dublin Evening Mail을 함께 운영하면서 연극비평가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극비평가는 그리 좋은 직업으로 비춰지지 않았지만, Stoker는 자신만의 수준있는 비평글로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876년 12월, 더블린 Theatre Royal에서 상영된 Henry Irving의 Hamlet에 호의적인 내용의 리뷰를 쓰고 나서, Irving은 그가 머물던 Shelbourne Hotel로 Stoker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면서 둘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Stoker는 또한 작가로서도 활동을 했는데, 1876년에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집필을 시작해 3년 뒤인 1879년 The Duties of Clerks of Petty Sessions in Ireland라는 non-fiction 책을 펴냈고 이는 지금까지도 문학계의 표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Stoker는 또한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1874년 Dublin Sketching Club의 원년멤버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1878년에 Stoker는 영국군 중령이었던 James Balcombe의 딸인 Florence Balcombe와 결혼하였습니다. Florence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하는데요,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또 하나의 유명한 아이리쉬 작가인 Oscar Wilde도 그녀를 흠모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Stoker는 Oscar가 학생이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그가 Philosophical Society 대학 학장으로 있던 시절에 그를 데려오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Wilde는 Florence가 Stoker와 결혼하자 분노했지만, Stoker는 이후에 Wilde와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Florence Balcombe


 후에 Stoker는 런던으로 집을 옮겨서 Irving의 Lyceum Theatre에서 Acting Manager로 일을 시작하여 Business Manager로 총 27년간 일을 하였습니다. 1879년 12월 31일, Stoker와 Florence의 외아들이 태어났고 Irving Noel Thornley Stoker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아들 이름도 Henry Irving의 Irving을 넣을만큼 Stoker와 Henry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Stoker는 사실 Henry와의 사이 덕분에 런던의 상류층 계급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Henry Irving과의 친분으로 많은 유명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중 Hall Caine과 친해졌는데 바로 이 Hall이 Stoker에게 드라큘라를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당시 Irving은 각 나라로 투어도 많이 다녔는데, Stoker도 덕분에 여러 나라들을 방문해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드라큘라의 배경이 된 동유럽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Stoker는 Irving이 배우로서 유명했던 미국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백악관에도 두 번이나 초대되어서 킨리(William McKinley)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전 대통령들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Henry Irving



 Stoker는 1890년 영국의 Whitby라는 마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그의 위대한 작품은 드라큘라를 창작하는데 부분적인 영감을 얻었습니다. Henry Irving의 비서이자, 런던 Lyceum Theatre의 책임자로 일하면서도 그의 소설 집필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는 1980년 Snake's Pass, 1987년 Dracula를 집필했고, 이 시기에 영국매체인 The Daily Telegraph의 Literary Staff로도 일하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습니다. 공포소설 The Lady of the Shroud(1909), The Lair of the White Worm(1911)도 연속해서 만들어냈습니다. 1906년 Henry Irving이 죽고 난 뒤, 그는 Irving의 일생을 그린 극을 집필해 Prince of Wales Theatre에서 상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드라큘라를 집필하기 전, 그는 Armin Vambery라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이자 여행가를 만났습니다. 드라큘라는 Vambery의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일어났던 어두운 이야기를 통해서 조금씩 탄생되기 시작했습니다. Stoker는 그 후 수년동안 유럽의 고전이야기들이나 뱀파이어와 관련된 미신이야기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최초의 드라큘라는 서간체 소설이었습니다. 서간체 소설이라 함은 편지형식 등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Stoker는 사실적인 내용들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허구적이고, 일기형식이나, 전보, 편지, 항해일지, 신문 스크랩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집필이 되었는데, 이러한 점이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에 상세하고 생동감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드라큘라가 처음 발행되었을 당시에는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상상의 창조물을 배경으로 한 공포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드라큘라는 Fantasy라는 형식의 원조가 되었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에 따르면, Stoker의 이야기는 "공포 소설", "낭만적으로 묘사된 고딕형식의" 이야기들 혹은 멜로드라마라고도 분류되고 있습니다. 드라큘라와 비교되는 작품으로는 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이 꼽힙니다. 드라큘라의 최초 541페이지 원본은 사라진 것으로 보여졌으나 1980년대 초, 미국 펜실베니아 북서쪽의 한 헛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원본에는 수 많은 교정의 흔적과 최초의 제목이었던 것으로 보이던 "THE UN-DEAD"가 필기체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문서 가장 하단에 Bram Stoker라고 남겨져 있었는데, 이 원고는 Microsoft의 공동설립자인 Paul Allen이 구입했습니다.

 Stoker의 드라큘라 이야기의 영감이 되었던 것은 Whitby 마을의 방문 이외에도 스코틀랜드의 Slains Castle, Aberdeenshire. 마을 방문과 더블린의 St. Michan's Chruch 지하실, 그리고 Sheridan Le Fanu의 중편소설 Carmilla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Stoker는 이후 각종 질병들로 고생을 하다가 1912년 4월 20일 St. George's Square 26번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혹자들은 tertiary syphilis(제 3기 매독) 때문에 죽었다고 하거나 다른이들은 그의 과로가 원인이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후 그는 화장이 되었고 그의 유골은 런던 최초의 화장터인 Golders Green Crematorium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61년 그의 아들인 Irving Noel Stoker 역시 사망 이후 그의 아버지 곁에 잠들었다고 합니다. 본래 Stoker의 배우자였던 Florence 역시 같은 곳에 안치되기로 했으나 그녀의 유골은 화장 후 미국의 Gardens of Rest에 뿌려졌습니다.

 Stoker는 Church of Ireland의 신교도(Protestant)로 자랐고, 자유당을 지지하며 조국 정세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냉철한 아일랜드 자치론자였던 그는 평화적인 의미에서 자치주의(Home Rule)를 지지했습니다. 또한 Stoker는 열렬한 군주제 지지자로서 자신의 조국이 대영제국(British Empire) 내에서도 하나의 영원한 독립체로서 유지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Stoker는 영국의 자유당 정치인 출신 영국 수상을 지냈던 William Ewart Gladstone 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그의 사상을 따랐습니다.





 Stoker가 사망한 뒤, 부인 Florence는 짧은 이야기들을 엮은 Dracula's Guest and Other Weird Stories를 1914년 발간했습니다. 이후 1922년 F.W. Muranu 감독의 Nosferatu라는 이름으로 Dracula의 첫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Nosferatu는 Stoker의 부인이자 상속자였던 Florence가 살아있는 동안 만들어졌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허락을 요청한 적도 없고 어떠한 로열티를 준다는 언질도 없었다는 이유로 British Incorporated Society of Authors를 통해 소송을 걸었습니다. Florence는 영화의 모든 출판권 등의 박탈을 요구하며 재판은 수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1925년 7월 Florence의 호의로 마무리 되었고 동시에 이 영화는 유명해졌습니다. 약 10여년이 지난 이후 마침내 첫번째로 개봉이 허가된 영화는 Universal Studios에서 제작한 Tod Browning 감독의 Dracula입니다. 

 Stoker의 조카의 손자(great-grand nephew)였던 캐나다 출생의 작가인 Dacre Stoker는 극작가 Ian Holt의 권유로 함께 2009년 Dracula : The Un-Dead를 재탄생시켰습니다. Dacre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Stoker가 직접 집필했던 노트 속 캐릭터, 내용들을 바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2012년 8월, Google에서는 Stoker의 165번째 생일을 맞아 Google Doodle에 선정하여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A Year In Dublin

Dublin, Ireland/About 2014. 4. 13. 00:52






나의 첫 아일랜드 가족들

Dublin, Ireland/Daily 2014. 4. 12. 22:13


 10월 21일,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여 학교에서 나오신 토마스 택시기사 아저씨와 함께 홈스테이 집으로 향했다. 더블린 6W의 Harold's Cross, 시티-학교와도 가까우면서 밤에도 위험하지 않은, 한마디로 좋은 동네!



홈스테이를 했던 마리아 아주머니 집과 아주머니의 밴!


 처음 홈스테이 아저씨 리차드를 만났을 때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사실 홈스테이라면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이리쉬 가족들을 상상했지만, 리차드 아저씨는 콩고 출신의 흑인! 게다가 흑인 아이들도 3명이나 있었다. 더군다나 아주머니가 없어, 잠깐 '흑인들만 사는 집으로 배정받은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가 지나고, 마리아 아주머니가 집에 돌아오셔서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만 9명이 있는 아주머니, 집은 전쟁터와 같았다. 막내 알베어, 테테, 피피, 던, 조지아, 진, 데이빗, 잭, 앨리스까지.. 데이빗과 잭은 해외에 나가있어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이렇게 아이들과 마리아 아주머니, 리차드 아저씨 총 11명이 한 가족이었다! 이건 우리 부모님 형제보다도 많은! 알고보니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다. 



나랑 제일 많이 놀아준 막내 알베어!


테테, 피피, 알베어! 악동 3인방!! 정말 인형같이 이쁜 아가들ㅠ



조지아와 그녀의 애견! 이름은 기억나질 않는다..



도도한 던! 떠나기 전날 드디어 사진을 같이 찍었다!



악동 3인방ㅠ



 무엇보다도 아가들과 너무 많이 정이 들었다. 처음엔 부끄러운지 가까이도 오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드는 아이들. 역시나 순수한 아이들은 어딜가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일랜드는 10월부터 밤이 짧아지고 춥고 비바람 불고.. 하필이면 이런 날씨가 시작될 때 가서.. 저녁이면 집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주방에서 아주머니 붙잡고 영어 쓰려고 많이 노력했다. 항상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내뱉지 못해 좌절했지만.. 이런 기회가 어디있겠냐며 꿋꿋이 도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럴때마다 계속 하라고 다독여주시고 영어도 알려주신 아주머니께 정말 감사하다. 

 아주머니는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와 같은 학교 선생님이다. 즉, 24시간 아이들만 본다는.. 한번은 아이들이 이렇게 많아서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적이 있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너무 좋고, 이 생활이 행복하다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를 맞아 아이들이 각자 가방을 하나씩 들고 초콜렛을 받으러 이웃집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에선 별로 신경쓰지 않는 할로윈.

 시티에는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넘쳤지만, 이렇게 마을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이웃집들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외치며 초콜렛을 받았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는데, 사진 찍는 기술이 너무 부족해.. 아쉬웠다...












 테테의 생일날, 같은 반 친구들을 초대해서 아주머니가 파티를 열어주셨다. 드레스도 입고, 귀여운 공주 테테! 이 날은 조지아의 친구들도 모여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어릴 적 딱히 생일파티라는 것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행복해보이는 테테가 너무 부러웠던 기억이..






 아쉽게도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되서 아주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했던 한을, 지난 1월에 초대를 받아 가서 찍을 수 있었다.


항상 나를 먼저 챙겨주시고, 영어도 열심히 써주신(?) 마리아 아주머니!

무뚝뚝한듯 하지만 항상 신경써주신 리차드 아저씨!

생활패턴이 달라 대화하긴 힘들었지만 상냥한 앨리스!

트리니티 법대졸업, 뉴요커의 꿈을 안고 날아간 데이빗!

직접 만난적은 없지만 아주머니에게 항상 전해들어서 친구같은 잭!

아주머니가 없을 때 엄마역할을 담당하고, 모델처럼 생긴 진!

사춘기답게 때로는 민감하지만, 활기가 넘치는 조지아!

도도하지만 착하고 축구를 사랑하는 던!

악동 3인방의 대장, 자이언트(?) 피피!

항상 무슨말을 하지만 제일 알아듣기 힘들었던 귀염둥이 테테!

나를 가장 신나게 반겨주고 놀아주었던 막내 알베어!

그리고 1월에 초대받아 놀러갔을 때 만난 리차드 아저씨들 아들2명까지!


나의 첫 아일랜드 가족은 이렇게 총 13명이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첫 한달여 간의 아일랜드 생활이었다. 



 



블로그 시작!

Dublin, Ireland/Daily 2014. 4. 12. 21:26



 아마 2008년 쯤 되는 것 같다. 군대 가기 전, 한창 NBA에 빠져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공유하고, 영어공부 한답시고 NBA기사 번역하고.. 열심히 했다가 군대가면서 2년을 쉬고, 제대 후에는 무엇을 했나 싶지만 아마 오프라인으로 열심히 뛴다는 명목으로 블로그는 접었던 것 같다.





아부다비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길에 만난 호주 가족들!



 이제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다시 블로그라는 것을 해보려고 한다. 늦은감이 있나? 6개월이나 됬는데 뭐 이제와서...? 항상 이러면서 후회를 반복하는 본인이 싫어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아일랜드라는 곳에 타국에 와서 생겼던 일들, 앞으로 생길 일들을 열심히 적어가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찾겠다는 목표하에 온 이 곳에서 무엇인가는 얻어가야겠다라는 마음은 항상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포스팅을 하며 기록으로 남기면서 꿈을 찾아보자!